SF 세계로 날아온 "나는야 수퍼맨"

    입력 : 2018.05.10 01:35

    '에셔의 손' 펴낸 소설가 김백상, 8년간 수퍼마켓서 일하며 퇴고

    초능력 쓰는 수퍼맨은 허구다. 그러나 이 '수퍼맨'은 허구를 쓴다. 경기도 동두천의 한 대형 수퍼마켓에서 8년째 일하고 있는 SF 소설가 김백상(41)씨는 첫 장편 '에셔의 손'으로 지난해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받았고 이를 최근 책으로 펴냈다. "매장에 하루 900명 안팎의 손님이 다녀간다. 여러 사람 만나고 관찰하는 게 소설 세공에도 도움이 된다."

    수퍼마켓에서 갈고 닦은 이 소설은 기억삭제술(術)이 대중화된 미래를 다룬다. 제목은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의 작품 '그리는 손'에서 따왔다. 연필 쥔 두 손이 서로를 그리는 에셔의 그림처럼, 기억이 사라지면서 주체와 객체를 혼동하게 되는 미래의 인간 군상을 의미한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총구를 바라보다 총알이 머리를 뚫고 지나가는 상상을 했다. 뇌가 망가지면 기억이 지워지겠지? 아예 기억을 지워주는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기억이 전부 사라지면 인간은 어떻게 달라질까?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퇴고만 8년. "닳도록 읽었다. 인쇄해서 거꾸로도 읽어보고. 포장도로 닦듯이 어색한 부분을 갈아냈다." SF 소설가 김보영이 "압도적인 필력"이라 극찬한 이유일 것이다.

    경기도의 한 수퍼마켓에 일하는 SF 소설가 김백상씨가 카트에 자신의 소설책을 담고 포즈를 취했다.
    경기도의 한 수퍼마켓에 일하는 SF 소설가 김백상씨가 카트에 자신의 소설책을 담고 포즈를 취했다. /이진한 기자

    그전에 압도적인 고통이 있었다. 서강대 경영학과 2학년 시절, 녹내장 판정을 받았다. "안압이 계속 올라가 두통이 극심했다." 이윽고 아버지가 간경화로 쓰러졌다. 어머니와 번갈아가며 밤새 병상을 지켰다. 4년이 흘렀고, 2007년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등졌다. "처음으로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고 했다. "뭐라도 토해내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음악이나 미술엔 재주가 없었으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게 글쓰기였다."

    홀린 듯 열흘 만에 원고지 500장을 써내려간 적도 있다. "글을 쓰고 싶었고, 퇴근 후 글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일터를 찾다보니 집 앞 수퍼마켓에 발길이 닿았다"고 했다.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매대 정리하고 짐을 옮기고 가끔 계산대 앞에도 선다. 소설 속 상상과 달리 현실의 그는 "기억을 삭제해 지금의 인생을 재부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분명 안 좋은 기억이 많다. 번듯한 직장도 아니고. 아마 어머니는 탐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업무에 치여 주말에도 못 쉬는 대학 동창들 보면 내 처지가 그리 나쁘지 않다."

    고로 이 수퍼맨의 차기작은 수퍼마켓을 다룰 전망. "때로 무례한 손님 때문에 모멸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는 거 아닌가. 늘 대접받고 살 수 있나. 그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나. SF는 일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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