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流 올라탄 한국어, '취미 언어'로 세계에 퍼질 것"

    입력 : 2018.05.12 00:39

    로버트 파우저 前 서울대 교수, 언어의 전파 경로 탐색한 책 펴내
    "외국어 학습 개념 희미해지고 즐기려 배우는 언어가 대세로"

    외국어 전파담

    외국어 전파담

    로버트 파우저 지음 | 혜화1117 | 356쪽 | 2만원

    로버트 파우저(56)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언어 사냥꾼이다. 13년간 한국에 살며 익힌 한국어와 미시간대 학부에서 전공한 일어는 모국어인 영어만큼 유창하고, 독어·불어·스페인어도 능숙하다. 중국어·몽골어·라틴어·에스페란토어를 섭렵했고, 대학원에선 사용자가 100명도 안 된다는 북미 대륙 선주민의 언어 루슈트시드(Lushootseed)까지 배웠다. '맹자'를 독파해 한문을 깨쳤고, 시조를 암송하며 중세 한국어도 공부했다. 교수가 된 뒤로는 언어를 가르쳤다. 고려대에서 영어를 가르친 이력은 평범한 축에 속한다. 1995년 일본 가고시마 대학에선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하고 '미국인이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흔치 않은 경험도 했다.

    2008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4년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가 언어의 전파 경로를 인문학적으로 탐색한 저서 '외국어 전파담'을 들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지난 9일 서울 서촌의 한 카페에 나타난 그는 "여러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언어의 역사와 전파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집필 배경을 밝혔다. 그는 한국어로 책을 썼다. "영어가 아무래도 편하죠. 그래도 한국인과 한국어로 직접 교감하는 게 더 보람 있을 것 같았습니다." 머리말이 셋인 것도 특이하다. 같은 내용을 한국어와 일어·영어로 저자가 직접 썼다.

    책은 저자의 학문적 견해를 담기보다는 언어의 전파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사례 중심으로 이야기하듯 풍성하게 들려준다. 서구의 언어학 서적들이 대부분 서양 사례 위주로 설명한 것과 달리 우리말과 중국어·일어 등에서 다양한 근거를 든 것도 눈길을 끈다.

    서울 서촌을 다시 찾은 파우저 전 교수. 그는 한때 이곳에 어락당(語樂堂)이라는 한옥을 짓고 살았다.
    서울 서촌을 다시 찾은 파우저 전 교수. 그는 한때 이곳에 어락당(語樂堂)이라는 한옥을 짓고 살았다. /성형주 기자
    저자는 먼저 언어 전파의 일반적인 경로를 서술한다. 중세까지 유럽인에게 모어(母語·mother tongue) 이외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라틴어 독해'를 의미했다. 라틴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선진 지식 습득을 위한 학문용 언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동아시아에선 한문이 그 역할을 맡아왔다"고 설명한다. 기독교의 확산은 라틴어를 퍼뜨리고 소수민족의 문자 발명도 촉진했다. 4~5세기 동로마제국은 고트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고트족 문자를 만들고 라틴어 성경을 고트 문자로 번역해 읽혔다. '외국어' 개념이 생성되고 국어와 대립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국가, 특히 근대 들어 동일한 언어를 쓰는 단일민족국가(nation-state)가 생겨나면서부터였다. 이후 국어의 통일과 외국어 학습을 위해 문법서가 등장하고 사전 제작이 활발해졌다.

    언어의 전파는 제국주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이뤄졌다. 저자는 "이 시기에 피지배국의 언어가 말살되는 '언어 제국주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쿠바·필리핀·하와이 등 식민지에서 영어를 억지로 가르치는 장면을 비판한 풍자 만화.
    미국이 쿠바·필리핀·하와이 등 식민지에서 영어를 억지로 가르치는 장면을 비판한 풍자 만화. /미국 국회도서관

    일제 강점기가 한국어에 끼친 영향과 일제의 식민지 언어 정책도 비중있게 다뤘다. 그는 일제의 한국어 말살 시도는 한·일 두 나라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와 피지배국이 인접했을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동화(同化) 압력'의 증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의 동화 압력은 약해진다. 아일랜드에선 고유어를 탄압한 영국이 인도에는 엘리트층에게 통치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 사용만 요구한 것도 동화 압력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향후 어떤 방식으로 전파될까. 저자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글로벌화가 진행됨에 따라 외국어 개념이 다시 희미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외국어라기보다 한국어라는 제1 언어와 함께 쓰는 제2언어가 되는 거죠." 그는 "제2, 제3의 언어는 다양한 이유로 습득하게 되는데, '취미용 언어'로 배우는 것도 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한국 청소년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감상하기 위해 일어를 배우거나 일본인이 한류와 K팝을 즐길 목적으로 한국어를 습득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저자는 "한류 외에도 경제 발전과 남북통일 여부 등이 앞으로 한국어 확산에 중요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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