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의 종횡무진 인문학] 신분이 아니라 실력이 존경받는 사회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입력 : 2018.05.12 01:00

    '한국전통문화론'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얼마 전 '조상이 잘 살았고 훌륭했다는 것을 알면 오늘날 주눅 든 청소년들이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한 유명 인사의 인터뷰를 읽었다. 필자는 며칠 동안 불쾌감에 시달렸다.

    한국사 연구의 태두였던 고(故) 이기백 선생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선조의 업적을 본받아서 자기도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반드시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업적을 남겨야만 후손의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기백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훌륭한' 조상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믿는 족보 자체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조선 시대 전 인구의 20~30% 정도가 노비였고 평민은 그보다 많았으니 현재 한국 인구의 대부분은 상민이나 노비의 자손이다. "그런데도 많은 가정에 족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족보가 모두 진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믿기는 힘들다."

    그러면서 하나의 사례를 든다. 해방 초기에 서울대 총장을 지낸 분 중 한 분은 부친이 노비 신분이었다. 그분 자신은 인격이 고결해서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분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자제가 부친의 전기를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양반 출신으로 기록돼 있더란다.

    '한국전통문화론'
    그리하여 이기백은 주장한다. "신분에 따라 인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지위를 규정하는 것은 낡은 시대의 유산일 뿐"이라고. "개인의 실력에 의하여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 능력에 적합한 사회적 지위와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민주사회의 바람직한 이상이다. 그런데 족보는 옛날의 신분적 질서를 유지·보전함으로써 인간을 차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며, 민주사회의 이상에 배치되는 것이다.".

    더구나 사실이 아닌 내용을 담은 족보를 근거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은 결국 남을 속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족보를 가지고 자기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는 날이 곧 진정한 민주사회가 이루어지는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시민으로서의 투철한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이 글의 제목은 '족보와 현대사회'다. 그리고 이 글이 실려 있는 책의 제목은 '한국전통문화론'(일조각·2002)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문화 혁명의 책"이다. 책의 겉모습과는 상반되게, 책의 내용은 대단히 세련되고 혁신적이다.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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